상가 계약을 마치고 가장 먼저 해야 했던 일은 간판 제작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간판이야 업체에 맡기면 금방 끝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막상 준비를 시작하니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과정이었습니다. 성인용품점을 준비하면서 가장 많이 했던 생각은 단 하나였습니다. "절대 흔한 느낌은 만들고 싶지 않다."

상호명부터가 고민이었습니다.
성인용품점이라는 업종 특성상 상호명을 정하는 것부터 쉽지 않았습니다. 직설적으로 해야 할까. 감성적으로 해야 할까. 딱 듣고 어떤 매장인지 알 수 있는 이름이 좋을 것 같으면서도, 너무 노골적이면 오히려 거부감이 생길 수 있었습니다. 고민 끝에 떠올린 단어가 바로 '레드(Red)'였습니다. 레드라는 색은 단순히 빨간색이 아니라, 사랑, 열정, 설렘. 연인 사이의 감정과 뜨거운 끌림, 로맨틱한 분위기를 떠올리게 하는 단어였습니다. 그래서 단순히 색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과 분위기를 담아낸 이름으로 '더레드(The Red)'를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기존 성인용품점 간판과는 다르게 만들고 싶었습니다.
상호명을 정하고 나니 이번에는 간판 디자인이 문제였습니다. 기존 성인용품점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었습니다. 강한 핑크색. 부담스러운 문구. 촌스러운 디자인. 어딘가 들어가기 민망하고 괜히 눈치 보이는 분위기. 하지만 제가 만들고 싶었던 매장은 그런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누구나 편하게 들어올 수 있는 곳. 카페처럼 깔끔하고 세련된 공간. "어? 여기 분위기 괜찮은데?" "카페인 줄 알았는데 라이프스타일샵이네?" 이런 반응이 나오는 매장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간판 하나에도 유난히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제가 직접 디자인하기로 했습니다.
지인 소개로 간판 제작 업체 사장님을 만나게 됐습니다. 예전에 라이프스타일샵 간판을 제작한 경험이 있다고 해서 시안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런데 시안을 보는 순간 머릿속에 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이건 아닌데..." 나쁘진 않았지만 내가 원하는 분위기와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어딘가 올드했고,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느낌이었다. 그날 이후 결심했다. "내가 직접 만들어보자." 그렇게 간판 디자인 지옥이 시작됐다.
지나가는 간판을 모두 연구했다
길을 다니면서 괜찮은 간판이 보이면 사진을 찍었다. 카페 간판도 보고, 의류 매장 간판도 보고, 인테리어 쇼룸 간판도 찾아봤다. 인터넷에서도 수많은 디자인 사례를 찾아보며 내가 원하는 분위기를 정리해 나갔다. 다행히 미리캔버스를 활용하니 생각보다 디자인 작업이 어렵지는 않았다. 오히려 점점 재미가 붙기 시작했다. 메인 간판부터 측면 간판. 창문 시트지. 출입문 문구. 계단 안내 문구까지. 하나를 수정하면 또 다른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폰트를 바꾸고, 글자 간격을 조정하고, 색감을 수정하고, 크기를 다시 조절했다. 간판 업체 사장님과 파일을 몇 번이나 주고받았는지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체리도 아니고 사과도 아니었다
글자만 있는 간판은 너무 딱딱해 보였다. 그래서 로고를 넣기로 했다. 처음 후보는 체리였다. 상큼하고 귀여운 느낌이 괜찮아 보였다. 하지만 너무 흔했다. 그다음에는 사과를 시도했다. 깔끔하긴 했지만 뭔가 애매했다. 결국 마지막에 선택한 것은 빨간 꽃이었다. 너무 노골적이지도 않고, 너무 가볍지도 않고, 'The Red'라는 이름과도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그 과정에서 디자이너들이 왜 중요한지 조금 알게 됐다. 로고는 단순히 예쁜 그림 하나를 만드는 작업이 아니었다. 브랜드의 분위기와 첫인상을 만드는 일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기억나는 순간
지금 돌이켜보면 잘 보이지도 않는 2층 간판에 왜 그렇게까지 집착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집착 덕분에 지금의 더레드 분위기가 만들어진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아직도 잊히지 않는 순간이 있다. 처음 완성된 간판에 조명이 들어오던 날. 그 빛을 바라보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이제 정말 시작이구나." "이제부터는 내가 원하는 스타일로 더레드를 하나씩 만들어 가는 거구나." 상가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을 때보다, 어쩌면 그 순간이 더 창업을 실감했던 날이었다.